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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어떤 사랑 - 정호승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 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 너의 일생이 단 한번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네 푸른 목숨의 하늘이 되고 싶었고 너의 삶이 촛불이라면 나는 너의 붉은 초가 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짧은 사랑 짧은 노래 사이로 마침내 죽음이 삶의 모습으로 죽을 때 나는 이미 너의 죽음이 되어 있었고 너는 이미 나의 죽음이 되어 있었다 더보기
백합보다 깨끗했던 인연 - 유성순 하얀 백합보다 깨끗한 마음 화가 나도 속이 상해도 가슴으로 다독여 주었던 백합처럼 하얀 마음 세월이 흘러가도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고맙고도 고마운 인연 우연한 만남으로 행운을 가져다주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백합보다 더 깨끗한 인연 다시는 볼 수 없다 해도 돌아 갈 수 없다 하여도 그 시절 고마움 가슴으로 간직하며 백합 꽃은 피었다 시들어 볼 수 없다 하여도 평생을 잊지못할 것 같은 백합보다 깨끗했던 나만의 소중한 인연 더보기
왜 몰라 - 이장근 더러운 물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연꽃만 칭찬하지만 연꽃을 피울 만큼 내가 더럽지 않다는 걸 왜 몰라 내가 연꽃이 사는 집이라는 걸 왜 몰라 더보기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더보기
밥 -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더보기
첫사랑 - 문숙 공사중인 골목길 접근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 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더보기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더보기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은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