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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더보기
나의 하나님 -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더보기
살다가 보면 -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더보기
꽃의 유언 - 천향미 화려했던 것을 기억하지 마라 향기로운 내마음도 기억하지 마라 아름다와 차마 꺾지 못했던 마음도 기억하지 마라 한 세상 그렇게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 지고나면 그만 꽃이 다음에 또 필거라 생각하지 마라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자그마한 기억으로 남아도 다음에 피는 꽃은 내가 아닌 것을.. 단지 꽃이 피었다고만 기억하라 더보기
폭풍의 언덕 - 기형도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 백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런닝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사바늘. 그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 더보기
영수증 - 최영미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당신이 불러주지 않아도 이렇게 와 섰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마지막 셈을 마쳤으니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시죠 제 것이 아닌 시간도 가끔씩 넘보며 훔치며 짐을 쌌다 풀었다 한세월 놀다 갑니다 지상에서 제가 일용한 양식 일용한 몸, 일용한 이름 날마다의 고독과 욕망과 죄, 한꺼번에 돌려드리니 부디 거둬주시죠 당신이 보여주신 세상이 제 맘에 들지 않아 한번 바꿔보려 했습니다 그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 당신이 지어내고 엮으신 하루가 밤과 낮 나뉘듯 취했을 때와 깰 때 세상은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앞으로 보여주실 세상은 또 얼마나 놀라울가요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 영수증.. 더보기
두꺼비 - 박성우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 더보기
메리제인 요코하마 - 황병승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 없지 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꾸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