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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 김용택 달이 화안히 떠올랐어요. 그대 등 뒤 검은 산에 흰 꽃잎들이 날았습니다. 검은 산 속을 나와 달빛을 받은 감미롭고도 찬란한 저 꽃잎들 숨막히고, 어지러웠지요. 휘황한 달빛이야 눈 감으면 되지만 날로 커가는 이 마음의 달은 무엇으로 다 가린답니까. 더보기
밤길 - 황인숙 달을 향해 걷는 발걸음 소리. 목적도 축도 없이 밤이 빙글 도는 소리.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소리. 한숨 소리. 나무가 호흡을 바꾸는 소리. 담쟁이 잎사귀가 오그라드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에 성큼 담벼락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림자 소리. 너무 지쳐서 꼼짝도 못 하겠어. 벤치에서 한 노인이 이 빠진 달의 찾잔을 어루만지는 소리. 가로등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 아무 반항 없는 시간의 기침 소리. 잠이 회유하는 소리. 잠시 구름이 멈추는 소리. 나는 네가 밤길을 걷는 것을 본다. 내게서는 달의 냄새가 난다. 너는 걷고, 걷고, 걷는다.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보기
블루의 소름 끼치는 역류 - 김혜순 수영장, 눈물 속을 헤엄치는 것 같다. 온몸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몸을 공기중으로 솟구칠 때마다 몸이 녹아내린다. 이럴 때가 있다. 눈물이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느닷없이 밖에서 쳐들어올 때가 있다. 바람 속, 내가 바람 공중에 솟구쳐오를 때마다 몸이 바람에게 몸 내어준다. 미루나무가 바람에게 몸 내어주듯, 나는 원래 바람이었나. 다시 수영장, 그의 눈이 터진다. 나를 바라보던 날마다의 눈동자들이 터져 흐른다. 나는 터져버린 시선의 홍수 속에 물안경을 고쳐 쓰고 첨벙 뛰어든다. 어항 속, 그들이 어항 속에서 껴안고 있다. 유리 속에서 뺨이 짓뭉개진다. 팔을 뻗칠 수 없으리라. 내 시선이 점점 그들을 좁혀 들어간다. 시선이 어항을 옥죈다. 그들은 눈조차 뜰 수 없다. 판유리가 껴안은 그들을 내.. 더보기
평행선 -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 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 부르며 가야만 합니까 나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 적 없지만 둘이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더보기
황혼의 나라 - 이정하 내 사랑은 탄식의 아름다움으로 수놓인 황혼의 나라였지 내 사랑은 항상 그대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가도가도 닿을 수 없는 서녘하늘 그곳에 당신 마음이 있었지 내 영혼의 새를 띄워 보내네 당신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물어오라고 더보기
어두워지기 전에 2 - 이성복 꽃나무들은 물감을 흘리며 일렬로 걸어갔습니다 소박한 연등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갔던가요 혼례의 옷에 죽음의 빛이 묻어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사람들은 흰빛 향기로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그대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의 눈빛은 흐려지고 늘어진 꽃나무 사이 그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보기
연두가 되는 고통 - 김소연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 더보기
사랑의 시작 - 용혜원 너를 만나던 날 부터 그리움이 생겼다. 외로움뿐이던 삶에 사랑이란 이름의 따뜻한 시선이 찾아들어와 마음에 둥지를 틀었다. 너는 내 마음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는 열고 말았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