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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 최현우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더보기
천년동안 고백하다 - 신지혜 내가 엮은 천 개의 달을 네 목에 걸어줄게 네가 어디서 몇만 번의 생을 살았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을게 네 슬픔이 내게 전염되어도 네 심장을 가만 껴안을게 너덜너덜한 상처를 봉합해줄게 들숨으로 눈물겨워지고 날숨으로 차가워질게 네 따뜻한 꿈들을 풀꽃처럼 잔잔히 흔들어줄게 오래오래 네 몸속을 소리 없이 통과할게 고요할게 낯선 먼먼 세계 밖에서 너는 서럽게 차갑게 빛나고 내가 홀로 이 빈 거리를 걷든, 누구를 만나든 문득문득 아픔처럼 돋아나는 그 얼굴 한 잎 다만 눈 흐리며 나 오래 바라다볼게 천 년 동안 소리 없이 고백할게 더보기
꿈 - 조병화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기심으로 물가로 수초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로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더보기
사랑 - 박철 나 죽도록 너를 사랑했건만, 죽지 않았네 내 사랑 고만큼 모자랐던 것이다 더보기
H E O K O H Y E H H O E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1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가, 아닌가? 길가에 핀 노란 양국을 꺾어 꽃잎을 떼며 점을 친 다음 5월의 바람에 날려 보내듯 나는 손가락을 잡아떼며 점을 친 다음 부러진 손가락들을 사방에 뿌린다 머리를 빗거나 면도를 할 때 새치가 보여도 은빛 세월이 무더기로 울려 퍼져도 분별이란 이름의 창피스런 상태가 내겐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임을 믿고 또 바란다 2 벌써 두 시요 자리에 들었겠구려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깨어 있을지도 서둘러 지급전보를 치진 않겠소 당신을 깨우거나 괴롭힐 필요가 어디 있겠소 3 바다는 되돌아간다 바다는 잠자러 떠나간다 사람들이 말하듯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랑의 조각배는 일상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당신과 나는 피장파장 서로에게 준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되뇐들 무슨 소용 4 벌써 두 시요 자리에 들.. 더보기
she walks in beauty - 조지 고든 바이런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Of cloudless climes and starry skies; And all that’s best of dark and bright Meet in her aspect and her eyes; Thus mellow’d to that tender light Which heaven to gaudy day denies. One shade the more, one ray the less, Had half impair’d the nameless grace Which waves in every raven trees, Or softly lightens o’er her face; Where thoughts serenely sweet express Ho.. 더보기
애너벨 리 Annabel Lee - 에드거 엘런 포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는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소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네. 그래서 명문가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천상에서도 반쯤밖에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날 시기했던 탓. 그렇지! 그것이 이유였지(바닷가 그 왕국 모든 사람들이 알 듯). 한밤중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그.. 더보기
유독 - 황인찬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가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