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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우울4 - 김승희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본다, 법의 말씀이다. 어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내가 죽인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밧줄을 목에 걸었다 할지라도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이다. 더보기
오라, 거짓 사랑아 - 문정희 꽃아,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제 그 모습은 무엇이었지?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붉은 입술과 향기 오늘은 모두 사라지고 없구나 꽃아, 그래도 또 오너라 거짓 사랑아 오라, 거짓 사랑아 더보기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더보기
당신의 눈물 - 김혜순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물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더보기
칠월 - 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보기
행복한 봄날 - 김소연 나의 가시와 너의 가시가 깍기 낀 양손과도 같았다 맞물려서 서로의 살이 되는 찔려서 흘린 피와 찌르면서 흘린 피로 접착된 악수와도 같았다 너를 버리면 내가 사라지는, 나를 지우면 네가 없어지는, 이 서러운 심사를 대신하여 꽃을 버리는 나무와 나무를 져버리는 꽃이파리가 사방천지에 흥건하다 야멸차게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처연하게 돌아서는 문 밖에서 서로 다른 입술로 새어 나오는 한숨이 있었는데 흘리는 눈물의 연유는 다르지 않았다 꽃봉오리를 여는 피곤에 대하여도 우리 얼굴에 흉터처럼 드리워진 이 나뭇가지의 글미자에 대하여도 우리의 귀에 새순이 날 때가지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더보기
김왕노 - 누가 나를 살다 갔다 내 몸은 부르지 않았을 텐데 내 꿈 속에 밤새 꽃피어 살다간 이는 내가 잠결에 그 누구를 불렀던가 못 견디게 그리워 꿈 속까지 찾아가 제발 와서 살다가라고 투정부렸던가 내꿈의 하루를 살다간 저 흔적 다 헤아리지도 못하는 쓸어버리지도 못할 나를 누가 살다간 저 붉은 흔적 내 머리맡에 밤새 낭자하게 쏟아진 꽃잎들 더보기
폭우 - 이창훈 지금껏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서서히 젖을 새도 없이 젖어 세상 한 귀퉁이 한 뼘 처마에 쭈그려 앉아 ​ 물 먹은 성냥에 우울한 불을 당기며 네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