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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 류시화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더보기
창살에 햇살이 - 김남주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 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더보기
내가 너를 - 나태주 내가 너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더보기
나 떠난 후에도 - 문정희 나 떠난 후에도 저 술들은 남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겠지 나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술에 취해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이겠지 혀끝에 타오르는 불로 아무렇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쓸쓸함으로 시를 쓰겠지, 나 떠난 후에도 꿀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거리를 비틀거리며 오늘 나처럼 슬프게 돌아다니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더보기
안부 - 최승자 나더러, 안녕하냐고요? 그러엄, 안녕하죠. 내 하루의 밥상은 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 한마디로 진수성찬이 되고요. 내 한 해의 의상은 당신이 보내주는 한 번의 미소로 충분하고요, 전 지금 부엌에서 당근을 씻고 있거든요. 세계의 모든 당근들에 대해 시를 쓸까 말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우연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다시 한번 물어주시겠어요, 나더러 안녕하냐고? 그러엄, 안녕하죠. 똑딱똑딱 일사분란하게 세계의 모든 시계들이 함께 가고 있잖아요? 더보기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더보기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 김재진 마음속에 한 여자가 있네. 비가 와도 떠내려가지 않는 여자 가끔은 마음속에 졸졸대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리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버린 세월. 침묵이 두려워 지나간 유행가를 불렀네.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변하지 않는 건 슬픔밖에 없네.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는 건 슬픔밖에 없네. 마음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더보기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