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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 류시화 달이 지구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 부터 달아 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 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 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 부터 달아날 수 없은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더보기
삶에 고통이 따르는 이유 - 정채봉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밖에 없다. 더보기
수국꽃다발 - 강미정 테이블 위에 수국꽃다발 두 개, 갑자기 테이블은 봉긋한 깊이를 가지고 침묵한다 꽃을 쓰다듬는 눈동자가 생기고 손가락이 생기고 설레는 두 손이 뻗어 나왔다 사랑스런 여인의 가슴을 만지듯 둥그레 꽃을 만져보는 남자, 유방암 예방으로 브래지어를 풀고 자는 아내젖가슴 생각이 났다는 거다 자다보면 젖무덤에 손이 가있다는 거다 말다툼이 줄었다는 거다 뾰족하던 감정도 무뎌졌다는 거다 무엇보다 마음이 순해져 일상이 평온해졌다는 거다 그러니 저 둥근 꽃숭어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한 게 맞다, 밤마다 내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당신의 손도 우리의 뾰족뾰족 거친 것을 혼자 풀었다는 것 수국꽃다발처럼 내가 가진 침묵 속엔 당신을 열고 설레게 한 부드러운 암호가 있다는 것, 더보기
1984 - 김소연 기름 얼룩에 절은 옷가지며 이불들 어머니는 개켰다 폈다만 하였다 풍경이 일그러진 집안 내력을 장마 끝에다 널어 놓았다 양지에 앉아서 동생은 젖어 못 쓰게 된 일기장을 태웠다 하얀 안개를 내뿜으며 저편에서 소독차가 달려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우루루 따라가고 있었다 휘어지고 모서리가 터진 장롱처럼 나는 골목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소각되는 미래가 집집마다 연기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곰팡이 호흡을 했다 아침도 어두웠다 조그만 비에도 우리는 어지러웠다 물의 발바닥이 밟고 다니는 낮은 위치를 더 낮게 낮추기도 했다 꿈들은 자주 누전되었다 고래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젖은 꿈을 꾸었다 물이 빠진 자국은 뚜렷한 선을 남겼고 우리는 해마다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며 도배지를 발랐다 더 이상은 젖을 .. 더보기
벚꽃이 지기 전에 - 김지녀 떠나야겠다, 몇 번의 짐을 챙기고 푸는 동안 사랑은 몸을 옮기고 떠나야겠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는 하얀 꽃그늘을 아주 거두어갔다 무릎걸음으로 달려가지만 당신은 저 멀리 검은 자루처럼 앉아 있네 내게 손짓을 하네 깨진 유리 같은 당신의 자리 그러니까 당신은 지나가는 휘파람이었겠지 여운처럼 남아 있는 구름이었겠지 아무리 불러도 잡히지 않는 길 건너 나무였겠지 내 안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 뒤돌아보면 제자리인 꽃잎들 나를 배웅하는 벚나무 저편으로 하늘이 천천히 문을 열고 있네 떠나야겠다, 사라지는 저녁으로부터 이 넓은 꽃그늘로부터 벚꽃이 다시 피기 전에 더보기
이제 누가 리라를 연주하지? - 이혜미 하나의 형식이 모든 내용을 결정할 때가 있어 그러니까 오늘의 대설주의보. 어제 위로 눈이 내리고 작별도 없이, 팔이 떠나네 가장 섬세한 머리카락을 뽑아 우리는 서로를 관통한다 나 대신 웃는 사람 너에게 가 묻고 싶어 흔적과 얼룩에 대해 흔적과 얼룩이 되어 무슨 말을 더 부려 네 바쁜 걸음을 내려놓고 밤의 현 위를 헤매이게 할 수 있겠니 너는 웃고 나는 쏟아져 하나의 음표가 순식간에 모든 악보를 지운다 꽃을 토하고, 이제 돌아와 백 개의 눈송이를 손에 쥐고 우리가 나눈 길고 아름다운 오늘이 좀 더 투명한 쪽으로 기울 때 더보기
이런 시 - 이상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어여쁘신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 더보기
쿨한 그들의 쿨하지않은 연애상담 - 홍단추 너의 너무 꽉 잡는 손이 너무 끔찍했다. 숨막히는 포옹이 끔찍했다. 멋대로만하는 키스가 끔찍했다. 한시간이나 꽁꽁얼어 꼼짝없이 기다리는 네가 끔찍했다. 정말 끔찍히도 좋았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