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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수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더보기
붉고 찬란한 당신을 - 이병률 뚫어지게 허공에 놓아줄까 번지게 물 속에 놓아줄까 더보기
나의 자랑 이랑 - 김승일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면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 더보기
짝사랑 - 이채 너무 어여삐도 피지 마라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도 눈부신 네 모습 볼 수 없을지도 몰라 어디에서 피건 내 가까이에서만 피어라 건너지도 못하고 오르지도 못할 곳이라면 다가갈 수 없는 네가 미워질지도 몰라 그저 이렇게라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다 태워서라도 널 갖고 싶은 꿈일 뿐이다 더보기
눈사람 여관 - 이병률 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더보기
집중의 힘 - 정용화 알고 보면, 꽃은 계절이 불러 모은 허공이다. 지상을 향한 땅의 집중이다. 흩어지는 것이 거부의 형식이라면 피워내는 것은 모서리를 견뎌낸 침묵의 힘이다.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나무는 땅 속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에 집중한다. 상처가 있던 자리마다 꽃이 피어난다. 꽃은 어둠 속에서 별이 떨어뜨린 혁명이다. 꽃으로 피어 있는 시간,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 날개에 집중한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새들의 울음을 간직하고 있을까. 온 몸이 귀가 되어 집중할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로는 어긋난 대답처럼 꽃 진 자리마다 잎새 뒤에 숨어서 가을은 열매에 집중한다. 알고 보면, 열매는 화려한 기억을 끌어모아 가을을 짧게 요약한다. 세상에서 집중 없이 피어난 꽃은 없다고 .. 더보기
어떤 소통 - 허영숙 울타리를 넘어 온 어린 염소 한 마리와 길 위에서 마주쳤다 큰 눈을 가진 어미 염소가 멀리서 불안하게 바라보며 서 있다 '매애' 하고 우는 염소 나도 '매애' 하고 소리를 질러본다 심지 세운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 사이를 나비 한 마리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도 소리를 잘라먹지는 않는다 이해 할 수 없는 대화에 긴장하는 논둑 위의 쇠뜨기 풀 다시 '매애' 하고 염소가 나를 보며 운다 나는 그 소리가 담고 있는 말을 알고 있다 '매애' 하고 지르는 내 대답에 염소의 눈이 투명해진다 눈과 눈 사이 가슴으로 지르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내 몸에서 탯줄을 끊어내고 나간 이도 못 알아듣는 말을 알아듣는 어린 염소 소통은 사람끼리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보기
푸른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