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썸네일형 리스트형 목숨 -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체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더보기 첫사랑의 강 - 류시화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꼈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들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를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흰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다 우리들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더보기 세월 - 김상현 까마득히 어렸을 땐 누워서 별을 세고 그보다 조금 커서는 뜨락의 꽃송이를 세고 그리고 어느 날부터서는 돈을 세다 늙어버렸다 가슴에 꽃 시들고 꿈 잃어버린 지금은 그저 가난할 뿐 더보기 리아스식 사랑 - 김왕노 내 말이란 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섬입니다. 당신은 섬의 어법도 모르고 내 어법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어법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도 모릅니다. 내 마음도 저 바다 위에 뚝뚝 지는 동백 꽃잎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동백의 어법도 모르고 동백 꽃잎을 싣고 먼 당신을 찾아갈 물결의 어법도 모릅니다. 동백 꽃잎을 대하고 속삭일 당신의 어법을 나도 모릅니다. 하나 당신의 어법에 익숙해 질 때까지 나는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수없이 몰아쳐 오는 태풍에 동백 꽃잎 같은 그리움만 뚝뚝 떨어뜨리며 내 어법에 당신이 익숙해 질 때까지 저물지 않는 섬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사랑이지만 우리의 모국어, 사랑의 어법에 우리의 입술이.. 더보기 시간을 읽으면 - 맹문재 시간을 읽으면 심장에 좋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하늘에 없는 별들이 행간에 보인다 별들의 밝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빛나 수평선을 넘는 데 필요한 나침반이 된다 시간을 읽으면 내가 도착할 역이 떠오른다 주위에는 향긋한 풀들이 침대처럼 펼쳐져 있고 흘러가는 강물이 보인다 팔락거리는 숲의 바람을 흠뻑 들이마셔 심장을 악화시키는 기운을 씻어내고 열차 바퀴를 힘차게 돌린다 첫사랑을 고백하듯이 시간을 읽으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들 듯 나의 심장은 밝아진다 더보기 너의 의미 -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더보기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 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더보기 전염병 - 강성은 우리 전염되지 않았어요 공기가 공기는 여전히 나쁘고 우린 곧 아프거나 죽겠지만 우린 전염되지 않았어요 장갑과 마스크는 필요 없어요 음악시간에 노래 불러도 되나요 체육시간에 함께 달려도 되나요 청소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우린 원래 그래요 전염되지 않았어요 우린 손을 잡아도 되나요 이어폰을 나눠 껴도 되나요 작년에 죽은 내 친구는 알까요 산 사람들도 죽음과 손잡고 있다는 걸 그게 어떤 기분인지 그게 어떤 슬픔인지 아직 우린 전염되지 않았어요 마스크 낀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친구들과 겨우 작별 작별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공기는 여전히 나쁘고 우린 곧 아프거나 죽겠지만 지구엔 누가 남을까요 그때에도 햇빛은 저렇게 찬란히 빛나겠지만 더보기 이전 1 ··· 5 6 7 8 9 10 11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