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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물에게 길을 묻다 4 ― 집착한다는 것 - 천양희 세상의 감정 중에 집착이 가장 무섭다고 누가 말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집착하지 않기로 했지요 날마다 욕심 버리면서 무심하게 살았지요 무심하게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욕심은 갈수록 줄어들지 않고 집착은 집요하게 매달렸지요 누가 경쟁 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여파는 나에게까지 미쳤지요 그때 나는 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렵다는 말을 생각했지요 새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잡초들을 언뜻 보았지요 바람에 휩쓸리고 추위에 웅크리고 있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집착을 버리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제야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기 때문이란 걸 겨우 알았지요 집착할수록 삶은 더 굽이쳤지요 오늘도 나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지요 중심을 잡고 싶어 잡아가고 싶어 더보기
자격 - 최영미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만큼도 나를 알지 못하는 당신들이 내 뒤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에게 내가 하고픈 말이 있다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좀도둑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고 살인자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어 더보기
실패의 힘 - 천양희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비가 그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으므로 나는 홀로 우월했으면 좋겠다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더보기
모를 일 - 천양희 탁상시계는 무슨 일로 탁상공론하듯 재잘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허수아비는 무슨 수로 허수의 아비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허허벌판은 무엇으로 허심탄회하게 넓이를 보여주는지 모를 일이다 무심한 하늘은 무엇 때문에 무심코 땅을 내려다보는지 모를 일이다 인생은 무슨 이유로 환상은 짧고 환멸은 긴지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이든 무슨 수로든 무엇으로든 무엇 때문이든 무슨 이유든 그 무엇도 모를 일 세상이 광목이라면 있는 대로 부욱 찢어버리고 싶은지 정말로 모를 일이다 더보기
그러면 - 김용택 바람 부는 나무 아래 서서 오래오래 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반짝이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오나요? 더보기
응시 - 황인찬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더보기
발레리나 - 최현우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더보기
H E O K O H Y E H H O E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1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가, 아닌가? 길가에 핀 노란 양국을 꺾어 꽃잎을 떼며 점을 친 다음 5월의 바람에 날려 보내듯 나는 손가락을 잡아떼며 점을 친 다음 부러진 손가락들을 사방에 뿌린다 머리를 빗거나 면도를 할 때 새치가 보여도 은빛 세월이 무더기로 울려 퍼져도 분별이란 이름의 창피스런 상태가 내겐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임을 믿고 또 바란다 2 벌써 두 시요 자리에 들었겠구려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깨어 있을지도 서둘러 지급전보를 치진 않겠소 당신을 깨우거나 괴롭힐 필요가 어디 있겠소 3 바다는 되돌아간다 바다는 잠자러 떠나간다 사람들이 말하듯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랑의 조각배는 일상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당신과 나는 피장파장 서로에게 준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되뇐들 무슨 소용 4 벌써 두 시요 자리에 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