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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밤 열한 시 - 황경신

 

 

 

 

 

 

밤 열한 시
참 좋은 시간이야
오늘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했으니
마음을 좀 놓아볼까 하는 시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못 했으니
밤을 새워볼까도 하는 시간
 
밤 열한 시
어떻게 해야 하나
종일 뒤척거리던 생각들을
차곡차곡 접어 서랍 속에 넣어도 괜찮은 시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던 마음도
한쪽으로 밀쳐두고
밤 속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시간
 
밤 열한 시
그래, 그 말은 하지 않길 잘했어, 라거나
그래, 그 전화는 걸지 않길 잘했어, 라면서
하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대줄 수 있는 시간
 
밤 열한 시
누군가 불쑥 이유 없는 이유를 대며
조금 덜 외롭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도
이미 늦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시간
누군가에게 불쑥 이유 없는 이유를 대며
조금 덜 외롭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밤 열한 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어도 괜찮은 시간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에 대해
그저 포기하기에도 괜찮은 시간
의미를 저울에 달아보거나
마음을 미치고 치우는 일도
무의미해지는 시간
 
밤 열한 시
내 삶의 얼룩들을 지우개로 지우면
그대로 밤이 될 것 같은 시간
술을 마시면 취할 것도 같은 시간
너를 부르면 올 것 같은 시간
그러나 그런대로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시간
 
밤 열한 시
하루가 다 지나고
또 다른 하루는 멀리 있는 시간
그리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사랑도 멈추고
모든 걸 멈출 수 있는 시간
 
참 좋은 시간이야
밤 열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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