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썸네일형 리스트형 대신 - 임솔아 빈방에 남아 있던 체취에게 양팔을 뻗었던 기억이 있다. 체취는 매번 사람보다 커다랗다. 기억 속에서 나는 울고 있지만 사진 속에서 나는 웃고 있다. 아이가 엄지발가락을 손가락 대신 입에 넣으려 한다. 발바닥 대신 손바닥과 무릎으로 걸어간다. 모빌의 그림자가 모빌 대신 벽을 공전한다. 더보기 빨간 - 임솔아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목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에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 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눈이 부시다 살인자에게서도 기도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와 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 사이를 헤맬 것이다. * 이곳으로 가면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인간이.. 더보기 모형 - 임솔아 기린이 보고 싶어서 기린을 보러 간다. 기린은 보지 못하고 기린을 만든다. 기린을 지구 옆에 둔다. 지구 옆에 얼굴이 백팔십도 돌아간 채 웃고 있는 영웅이 있다. 지구가 보고 싶어서 지구를 돌린다. 바다가 이렇게나 더 많은데 해구가 아니라 지구가 되다니. 기린에 기린이 없어서 지구에 지구가 없어서 사람에 사람이 없어서 좋다. 보려던 것을 못 보면 가짜를 만들게 된다. 나는 사람 같은 모형이 된다. 이 세계도 어느 세계의 모형에 불과하다. 보고 싶은 세계를 보지 못해 이 세계를 만들던 손들이 지금 이 세계를 부수고 있다. 세계가 세계로부터 헛걸음을 한다. 나는 나를 모형들과 함께 세워둔다. 더보기 아름다움 - 임솔아 바다를 액자에 건다. 바다에 가라앉는 나를 본 적이 있다. 팔다리가 부식되어 산호가 되어갔다. 허옇게 변한 사지가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저기 열대어가 있어, 스킨다이버들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젖은 빵을 찢어 던졌다. 아름답다는 말을 산호 숲에 남겨두고 스킨다이버들은 뭍으로 돌아갔다. 나를 그곳에 둔 채 나도 꿈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가서 정육점과 세탁소 사이에 임대문의 종이를 쳐다보고 서 있다. 텅 빈 상가 속에서 마리아가 혼자 퀼트 천을 깁고 있다. 이 액자를 다시 바다에 건다. 더보기 윈터바텀 - 신해욱 잠이 오기 전에 어서 옷을 입어. 어서. 옷을 덮고 잠이 들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어진다. 옷 위에 하나의 이야기가 그 위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낮게 점점 더 낮게 무너져 내려서 나의 진실에 대해서는 몇 대목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삼차원에 합류하기 위해 기울인 눈물겨운 노력들이 전부 쓸모없어지게 된다. 셀 수 있는 손가락만이 점점 많아지게 된다. 중복되는 손가락으로는 희망을 걸 수 없어서 나는 그리고 너는 춥게 된다. 음수를 상상하지도 못하면서 영보다 작아지게 된다. 더보기 비 - 김혜숙 그래도 내려야지. 그래도 내려서 적시기 시작해야지. 저 단단한 콘크리트 아스팔트의 길을 우선은 적셔 보아야지. 나에겐 눈물밖에 없지만 그래도 적셔 보아야지. 적시고 적시고 또 적시다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틈 그 틈을 찾아 내어 마침내 비집고 들어가야지 저 깊은 어둠 속으로 그 죽음 속으로 스며들어야지. 나에겐 정말 눈물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려야지 비가 되어 내려야지. 완전히 포기하고 엎드려 있는 씨앗, 그 씨앗을 건져 내어 그래서 눈을 뜨게 해야지. 피어라 피어라 꽃이 피게 해야지. 나에겐 정말 눈물밖에 없지만. 더보기 붉은 가위 여자 - 김혜순 저만치 산부인과에서 걸어나오는 저 여자 옆에는 늙은 여자가 새 아기를 안고 있네 저 여자 두 다리는 마치 가위 같아 눈길을 쓱 쓱 자르며 잘도 걸어가네 그러나 뚱뚱한 먹구름처럼 물컹거리는 가윗날 어젯밤 저 여자 두 가윗날을 쳐들고 소리치며 무엇을 오렸을까 비린내 나는 노을이 쏟아져 내리는 두 다리 사이에서 눈 폭풍 다녀간 아침 자꾸만 찢어지는 하늘 뒤뚱뒤뚱 걸어가는 저 여자를 따라가는 눈이 시리도록 밝은 섬광 눈부신 천국의 뚜껑이 열렸다 닫히네 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나님이 키운 그 나무 그 열매 다 따먹은 저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 붉은 몸뚱이 하나씩 잘라내게 되었을 때 아침마다 벌어지는 저 하늘 저 상처 저 구름의 뚱뚱한 줅은 두 다리 사이에서 빨간 머리 하나가 오려지고 있을 때 (저 피가 내.. 더보기 밀 어 - 강계순 몸에 해롭다고 극구 말리는 친구들의 권유에도 고집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내 기관지나 오장 육부 어디쯤 타르의 점액질이 끈적끈적 달라붙어 시커먼 손으로 목숨을 노리면서 서서히 서서히 자라 가고 있겠지만 친구여, 목숨 노리는 일이 어디 그것뿐인가. 아침 저녁 우리의 식탁에 꽂히는 푸른 독소, 수은의 함량, 복병처럼 위장 속으로 숨어드는 멸망의 식량. 사월에 터진 총알도 한 개쯤 이 가슴에 박혀서 금속성으로 울면서 울면서 심장을 긁어 대고 있다. 덜 떨어진 이마의 부스럼은 때없이 피고름으러 터져 부끄러운 상처를 드러내고 다스릴 길 없는 사랑의 열기 아직도 나를 들끓게 하나니, 더우기 친구여, 시를 쓰는 일만큼 정확하게 목숨 노리는 일 앞에서 어찌할 건가? 모두 다 탕진하고 허깨비로 쓰러질 때까지 매달리고 쓰러지.. 더보기 이전 1 2 3 4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