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썸네일형 리스트형 카오스 - K에게 - 진은영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모래야 먼지야 나는 왜 이리 작으냐구? 그래, 그것은 너무 가벼운 반성 나비의 날갯짓으로 되어 있는, 오래된 집의 거미줄처럼 상투적인. 노랑나비가 팔랑거렸다 매일 그런 것처럼, 아프리카로 달아나던 내 마음에 폭풍이 쳤다 더보기 견습생 마법사 - 진은영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나무 내가 만든 사과 한 알을 따기 위해 이브는 복숭아가 익어가는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다, 잠이 든다 에덴 동산의 시간에 출현한 무릉도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윌리엄 텔은 아들에게 독화살을 날리는 비인간적인 일에서 해방된다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마치고 왕비는 여전히 질투심에 불탔지만 한 알의 사과를 구하지 못했네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류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맑은 밤, 들에 나가면 목성의 주황색 얼음띠가 예쁜 팔찌처럼 선명하네 그레도 세잔은 한 알의 복숭아로 빛의 마술을 부렸겠지 프로스트는 .. 더보기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는 웬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것인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데 먼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더보기 고흐 - 진은영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더보기 유배일기 - 허수경 안개의 쓸쓸한 살 속에 어깨를 담그네 유배지의 등불 젖은 가슴에 기대면 젊은 새벽은 이다지도 불편하고 뿌리 뽑힌 꿈의 신경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부서지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그리워 쫓아낸 자의 어머니가 될 때까지 이 목숨 빨아 희게 입을 때까지 더보기 시라는 덫 - 천양희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 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씌어진 한 페이지를 갖고 있지 말도 마라 누가 벌받으러 덫으로 들어가겠나 그곳에서 나왔겠나 지금 네 가망(可望)은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그 한마디 듣는 것 이제야 알겠지 나의 고독이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너의 고독을 알아보는지 왜 몸이 영혼의 맨 처음 학생인지 더보기 Korean Air - 최영미 I am a very stylish girl I am a very stylish girl ˙˙˙˙˙˙ (She is walking like a model) Yes, you are a very sexy girl May I ride on you? Korean air. **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항공회사의 국내 광고인데도 한국어가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 파격에 대응해, 나도 영어로 시를 만들었다. 아주 멋진 여자예요. 노래에 맞춰 그녀들은 몸을 흔들며 걸어나온다. 탐스러운 입술을 벌리고, 요부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는다. 목까지 올라간 정장차림의 제복이 어색하게 요염한 인형들은 포르노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나체가 외설의 핵심은 아니다. 과도한 노출이 없어도 화면에 크게.. 더보기 아침에 - 천양희 삶은계란 먹다가 목이 막혀 가슴을 치네 아무래도 내가 삶은계란을 삶은 계란이라 잘못 읽은 것 같네 이해할 수 없어도 계속되는 것이 삶이라면 목에 걸린 건 삶은계란이 아니라 그것이었나 문득 목이 메어 누구나 슬프면 저녁노을을 좋아한다는 말 생각해보네 말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먹어치우는 것이라 하네 그래서 나는 아침인데 저녁노을을 먹어치우네 얼굴에 그늘질 일은 없을 것이네 더보기 이전 1 2 3 4 5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