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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숲에 관한 기억 - 나희덕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정말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더보기
첫 - 김혜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 더보기
천사 - 신해욱 나는 등이 가렵다. 한 손에는 흰 돌을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다. 우산 밖에는 비가 온다. 나는 천천히 어깨 너머로 머리를 돌려 등 뒤를 본다. 등 뒤에도 비가 온다. 그림자는 젖고 나는 잠깐 슬퍼질 뻔한다. 말을 하고 싶다. 피와 살을 가진 생물처럼. 실감나게. 흰 쥐가 내 손을 떠나간다. 날면, 나는 날아갈 것 같다. 더보기
축, 생일 - 신해욱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더보기
레코더 - 황인찬 교탁 위에 리코더가 놓여 있다 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그 아이의 리코더를 불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보고 있었다 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에서였다 더보기
거리 - 이준규 서러움에 어떤 거리가 생겼다. 모든 사물은 어떤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비가 쏟아졌다. 어디였을까. 내가 자세히 그리워하지 않았던 곳이. 택시에서 문득 울고 싶은 대낮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성당이나 철길을 보고 서러워지는 것도 이유가 없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들깨 향이 났다. 꺳잎을 보면 야구공이 생각나는 건 개인적인 일이다. 오래된 커피 자국을 본다. 더보기
지평선 -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더보기
그런 날이 있었는지 - 김명기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가급적 아주 먼 길을 돌아가 본 적 있는지 그렇게 도착한 집 앞을 내 집이 아닌 듯 그냥 지나쳐 본 적 있는지 길은 마음을 잃어 그런 날은 내가 내가 아닌 것 바람이 불었는지 비가 내렸는지 꽃 핀 날이었는지 검불들이 아무렇게나 거리를 뒹굴고 있었는지 마음을 다 놓쳐버린 길 위에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날 숨 쉬는 것조차 성가신 날 흐린 달빛 아래였는지 붉은 가로등 아래였는지 훔치지 않는 눈물이 발등 위로 떨어지고 그 사이 다시 집 앞을 지나치고 당신도 그런 날 있었는지 더보기